미이케 탄광의 역사

이 패널은 미이케탄광을 비롯해 그 관련 시설이나 탄광 콤비나트의 약도입니다. 미이케탄광의 석탄은 지금부터 500년 전의 무로마치 시대(1338∼1573) 에 도카산[稲 荷山]이라는 산에서 발견되었고 1997년 3월 30일 폐산 때까지 528년간에 걸쳐서 채굴 되었습니다. 석탄층은 산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약 5도의 경사가 있고 발견된 장소에서는 손으로도 채굴할 수 있으며 이곳 만다갱에는 264m 깊이에 석탄층이 있었습니다.

석탄이 발견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에도 후기로 세토나이[瀬戸内] 지 방의 제염용 연료로서 주로 판매되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미이케탄광은 메이지 초 기에는 메이지 정부가 직할해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근대적인 방법이 도입되 어 대규모로 개발되어 일본 최대의 탄광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875년 에 외국인 기술자 무세[Mouchet]가 미이케탄광을 조사했는데 탄층과 탄질이 모두 양호 한 우수 탄광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외국 선박용 연료로 상하이 [上海]에 석탄을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1876년부터 미이케탄광을 본격적으 로 개발했습니다. 정부는 외국인 기술자 포터를 파견해 신기술을 도입하고 개발을 추진 하였습니다. 미이케탄광은 외국인 기술자의 도움으로 일본의 광산 중에서도 나가사키현 [長崎縣] 다카시마[高島] 탄광에 이어 빠른 시기에 근대화를 달성했습니다. 1884년에 는 미국의 메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당시의 최첨단 광산기술을 공부한 단 타쿠마가 미이케로 부임함으로써 이후 미이케탄광의 발전과 확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메 이지 중기부터 후기까지의 주력갱이었던 갓타치갱[勝立坑]은 수갱 발굴 시에 다량의 용 수 문제가 발생하여 미이케탄광의 존속 자체조차도 비관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단 카쿠마가 1893년 갓타치갱에 당시로는 최첨단 기계인 영국제 배수용 펌프를 도입하여 용수를 극복함으로써 미이케탄광 발전의 초석을 세웠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때 갓타치 갱에 도입된 펌프는 당시 세계 최대의 배수용 펌프로서 영국 문헌에도 소개될 정도로 대 규모였습니다. 미야노하라갱과 만다갱은 갓타치갱 다음으로 개설된 주력갱으로 미야노 하라갱은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만다갱은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전기까지 활약했습니다. 미야노하라갱은 1883년에 설치된 미이케 감옥과 가장 근접한 갱구로서 많은 죄수들이 노동자로 투입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만다갱은 미야노하라갱 남 쪽 1.5km 정도의 위치에서 개갱했으며 당시 일본 탄광의 규범이 되도록 미쓰이[三井]에 서 총력을 기울여 정비한 갱구입니다. 1897년에 채굴을 개시해서 1902년에 완성된 제 1수갱과, 1898년에 채굴을 개시해서 1908년에 완성된 제2수갱으로 구성됩니다. 일본 최대규모의 수갱으로서의 위용을 자랑하였으며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 시대에 걸쳐 더욱 기계나 설비가 충실해져 출탄량도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채탄 현장이 멀 어짐에 따라 갱내 운반의 효율 악화 등의 요인으로 1951년에 폐갱했습니다. 만다갱 이후의 주력갱으로는 요쓰야마갱[四山坑], 미카와갱[三川坑], 아리아케갱[有明 坑]이 있으며 이들은 전후 복구에 큰 공헌을 했지만 노동쟁의나 폭발사고, 석탄에서 석 유로 전환되는 에너지혁명 등이 원인으로 경영이 악화되었습니다. 외국탄과 국내탄과의 가격차로 인하여 경영이 악화됨으로써 생산체제가 점차 축소되었으며, 결국 미이케탄광 은 1997년 3월에 폐산함으로써 미쓰이 경영 108년, 관영 124년이라는 근대 탄광의 긴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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